동아일보 특별기획 [장애, 테크로 채우다] 시리즈가 7월 29일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기획의 에필로그는 각 회별 주인공들이 직접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일상’입니다. 삶은 이렇게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펼쳐집니다. 지면 제약으로 미처 전하지 못했던 ‘손끝으로 세상을 보는 마케터’ 고미숙 씨의 이야기도 만나보세요.
다양한 몸들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김예솔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릴라 엘리펀트 창업)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의 힘은 커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그 주변을 바꾸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장애를 갖고 살아오면서 밥을 먹고 자고 놀고 싶은 욕구는 친구나 저나 비슷했는데, 세상은 저를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좋을 텐데, 자꾸만 다른 게 마치 결점인 것처럼 인생의 성적표에 감점을 주는 것 같았어요. 그 성적의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한 걸까요?
스웨덴에는 ‘얀테의 법칙(Jantelagen)’이라는 오래된 사회적 규범이 있습니다. 당신이 남보다 특별하다거나, 똑똑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 법칙이 현대에 와서는 개인주의와 상반되고 구시대적인 사상이라는 의견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규범 덕분인지 스웨덴에서는 저의 장애가 그렇게 신기한 일로 비쳐지지 않는 것 같아요. 저처럼 휠체어를 타며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스웨덴 사회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신념아래 만들어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식 때문인지 장애학생이 학교에 입학한 뒤에야 편의시설이 마련되는 게 아니라, 장애학생의 재학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학교는 장애인이 접근가능하게 지어져야 합니다. 교육 시스템 역시 장애 학생 개별의 요구에 따라 모든 지원을 국가와 지자체가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반면, 제가 성장기를 보냈던 한국에선 아빠가 저를 일반고에 보내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했어요. 저를 ‘받아준‘ 유일한 학교는 건물에 엘레베이터가 없었는데요. 학교 측은 기존 계단 위에 임시로 나무 경사로를 만드는 비용을 저희 부모님이 학교 발전기금 차원에서 부담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조건을 받아들인 뒤에야 저를 입학시킬 수 있었어요.
저의 중고교 시기 6년 간의 통학 역시 부모님의 몫이었습니다. 당시에(현재도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는 아닙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는 휠체어로 탈 수 있는 대중교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미술을 하겠다는 저를 위해 여름방학이면 엄마는 생업을 뒤로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미대 입시를 위해 서울 홍대 앞 미술학원에 다니겠다는 저를 따라서 홍대 앞 월셋집에서 같이 살면서 활동 보조 겸 공부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개인의 노력과 열정으로 무언가 성취를 이루는 데에는 환호하지만, 그런 가시적인 성공의 대가로 치러야했던 보이지 않는 희생에 대해선 당연시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운영되는 장애인 활동 보조 서비스가 저의 성장기에도 있었다면, 엄마는 친구들도 만나고 취미 생활을 즐길 여유가 있었을 거예요. 또 지금처럼 장애인 이동 지원 차량이나 저상버스 같은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 인프라가 있었더라면 아빠는 저의 ‘365일 운전기사’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그런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준 부모님이 없었다면 저에겐 배움의 기회가 애초부터 없었을지 모릅니다.
2007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을 때 디자인과 건물에 편의시설 개선을 요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학과 교수님들과 조교님들을 포함해 학교 구성원들이 한 마음으로 제 요구에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그 요구가 대학 총장님께 전달되어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난 후, 학과 조교님이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연히 있었어야 했던 편의시설이지만, 그럼에도 총장님께는 감사를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조교님의 말은 제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어요. 엘리베이터가 장애 학생 단 한명을 위해 1억원을 투자한 시설로 해석되는 게 아니라,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편적인 접근성을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담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웨덴에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배움의 기회를 갖습니다. 그 결과 장애인 역시 직업 능력을 갖추게 되고, 고용시장에서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며 다시 사회에 환원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데 저의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자유를 저는 비로소 타국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많은 에너지를 창작에 쏟고 있어요. 평소 휠체어를 타면서 필요했던 일상 도구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능적일 뿐만 아니라 집안 한 켠에 두고 보기에도 아름다운 물건들입니다. 집안의 다른 물건들과도 조화를 잘 이루는, 튀지 않는 미감을 추구합니다.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곁에 두고 싶은 가구이면 좋겠거든요.
‘릴라 엘리펀트’에서 만드는 저의 가구들이 세상에 나와 훈훈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봅니다. 얀테의 법칙처럼 말이죠. 겸손하게 자기 할일을 묵묵히 하는 ‘믿음직한 사람’같은 가구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다양한 몸을 가진 저와 우리가 여전히 아름다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 가구들이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나에게 걷는다는 것의 의미
김승환 (‘입는 로봇’ 연구원·KAIST 기계공학과 웨어러블로봇 연구실)
아침에 눈 뜬 뒤 침대에서 내려와 디디는 첫발, 은은하게 흙냄새가 나는 여유로운 산책길, 시끌벅적한 음식점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때의 설렘… 일상 속에서 내딛는 수많은 걸음은 많은 이들에게 당연한 일상의 일부입니다. 제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된 뒤 ‘걷기’가 지니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다시 걸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때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서서히 ‘가능’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산책하고,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가고 싶은 곳을 아무런 걱정 없이 언제든 갈 수 있는, 한때는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꿈과 희망도 더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이고요.
웨어러블 로봇은 아직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애인들이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장애인들의 자립과 사회 참여를 증진시킬 통로가 될 것이며, 휠체어를 타던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에도 혁신을 가져올 것입니다. 장애인이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장애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발전한 기술은 장애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공경철 교수님을 필두로 한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엑소랩(Exoskeleton Laboratory)에서 저를 포함한 20명의 연구진들은 더 나은 로봇 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운 로봇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연구실 속 일상을 SNS 등을 통해 여러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웨어러블 로봇이 우리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2024년에 열리는 로봇·장애인 융합 국제 올림픽인 사이배슬론(Cybathlon) 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보면, 언젠가 로봇이 휠체어를 대신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내가 이래서 음악을 못 끊나보다
임채섭(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뮤직프로듀싱팀‘티스푼’소속)
30년 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매미의 강렬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침 오늘도 30년 전 그런 강렬한 매미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를 매개로 과거를 회상해봅니다. 혼자서 뭔가를 가지고 놀고 관찰하기 좋았던 저는 그 때 리코더를 불고 있었습니다. 30년이 흐르며 그 리코더는 이제 건반과 컴퓨터로 바뀌어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시점부터 음악을 연주하고, 만들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 알기 어렵지만 각각의 매력이 다르기 때문에 음악 안에서 직업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침이 되면 산책 때 메모 했던 음원 수정사항을 반영해 음악적인 스케치를 조금 더 구체화시킵니다. 이런 수정 작업은 시력이 남아있던 예전에도 했던 일이지만 이걸 보이스 오버(화면을 읽어주는 서비스) 기능으로 하려고 하니 새로운 훈련처럼 느껴집니다. 컴퓨터가 발전해도 아직은 가상 악기의 여러 가지 값을 정확하게 딱 일치시켜서 읽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어떤 기술이 좀더 편하고 적응할 수 있는 대안인지를 계속 찾아가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컴퓨터로 음악 작업을 하다보면 화면 확대를 했을 때 건반 일부가 안 보이기도 합니다. 음의 높낮이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죠. 강약 조절이 잘 되는지 보기 위해 화면 아래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음표를 보기 위해 화면 위로 올라가다보면 커서가 엉뚱한 곳에 가 있기도 합니다. 다행히 요즘 저는 PC를 활용해 음악을 만들 때 ‘logic remote’라는 앱을 활용해 아이패드를 컨트롤러로 사용하는 대안을 발견해가고 있어요.
예전에는 건반으로 음표를 입력했던 방법을 썼지만 지금은 시각장애인 음악인에 맞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죠. 작업 속도는 과거보다 조금 느릴 수 있지만 마우스로 음표를 일일이 찍고 강약을 수정하거나 가상 악기 등을 걸어줄 수 있어 할 수 있는 작업의 범위가 계속 넓어지고 있어요. 이런 방법을 쓰면 좀더 객관적인 모니터링이 되기도 하고, 특이한 화성이나 리듬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좋기도 합니다.
제가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들은 이 순간에도 계속 새롭게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기술들을 가까운 분들의 도움을 통해서 익혀나가고 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저에게 맞는 멋진 기계나 프로그램들을 꼭 찾게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중에 전맹이 오더라도 이런 기술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요즘은 틈틈이 점자 공부를 하고, ‘한소네’라는 점자 단말기를 익히고 있어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진행성 장애로 인한 분노들이 저에게는 젊은 날의 혈기였던 거 같기도 합니다. 이런 분노들은 어찌 보면 열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살고 싶은 열정, 음악을 하고 싶은 열정, 칭찬받거나 뽐내고 싶은 열정 같은 거 말이죠. 이런 것들이 가라앉고 있는 부표가 기적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듯, 저를 다시 떠오르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게임을 즐기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게임의 세계에선 ‘켠 김에 왕까지’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 이 말을 듣고 ‘무조건 끝까지 가서 엔딩을 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잘 살든 못 살든, 제게 주어진 지금 이대로의 인생을 끝까지 즐겨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음악은 미우나 고우나 저의 친구입니다. 사람 속은 알 수 없고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지만, 음악은 노력의 영역이므로 저에게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아마도 그래서 제가 음악을 못 끊나봅니다.
첫 발은 천근만근이지만… 내딛고 나면 어떻게든 나아가는 것이 삶
이규환 (중증장애에 맞선 치과의사·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교수)
다치고 나서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 담당 의사는 제게 “더 좋아지지 않는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전신마비가 된 몸으로 뭘 하다가 죽을까’ 만 번을 생각해도 치과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반대했고 미쳤냐고 욕했지만, 정말 0.1초라도 치과의사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재활원을 나와 1년 만에 치대에 복학했습니다. 재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겁쟁이가 되고, 사회로 나오는 게 더 두려워질 것 같아서요. 복학 후 처음엔 휠체어로 문턱을 못 넘어서, 문 앞에서 눈치 보며 하루 종일 계속 버텼습니다. 교수님들은 한숨만 쉬셨죠. 그러다 예방치과 교수님, 방사선과 교수님께서 처음으로 “들어와, 해보자”라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자료를 줄 테니까, 여기서 판독을 해”라면서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가장 힘든 건 첫 발이에요. 저는 강연을 할 기회가 있을 때면 “장애인은 비장애인만큼 노력해선 안 된다”고 늘 이야기합니다. 그냥 버티는 것도 힘들겠지만 거기서 한 발짝씩만 더 나아가라는 거죠. 그 과정에서 보조기기와 기술, 최신 장비를 활용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인 거 같아요.
사실 한 발 내미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 한 발이 수만근의 무게입니다. 근데 그것만 내딛으면 어떻게든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요. 삶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한 번뿐인 인생, 진짜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어야죠. 최중증 장애인인 저도 이렇게 해냈잖아요.
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래서 보여드리는 거예요. 0.1%의 희망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시라구요. 저도 중환자실에서 누워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해낸 분들의 기사들을 읽고 희망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때의 저처럼,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고 있는 분들께서 제 이야기를 보고 “그래, 까짓 거 나도 한번 해보자”라는 희망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 색으로 그려진 하루하루지만 예쁜 꽃처럼 피어나게 가꿀 거예요
고미숙 (손끝으로 세상을 보는 마케터·소셜벤처 ‘닷’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저의 하루는 한 가지 색으로 그려진 그림이에요. 하지만 사랑을 받는 날엔 몽글몽글해지고, 시선을 집중받는 날엔 스크래치가 생겨서 하루하루가 모이면 드라마처럼 다채로운 스케치북이 만들어진답니다.
그날을 떠올려볼까요. 살랑 부는 봄바람에 기분도 설렜던 날이었어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러 흰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섰는데요. 점자 블록이 없는 길을 ‘초집중’하며 걷다가 앞에 오던 사람과 부딪치면서 지팡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거예요. 친절한 그분은 흰 지팡이를 손에 쥐여 주며 사과도 해 주셨죠.
‘역시 세상엔 좋은 분들이 많아’ 흐뭇해하며 지하철역에 도착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며 걸었지만 주말이라 붐비는 통로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니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소심한 저는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죠.
“저… 제가 눈이 안 보여서요. 지하철 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
돌아오는 건 대답 대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터벅터벅’ 하는 발소리뿐이었습니다. 혼자서라도 길을 찾으려 기억을 더듬고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같은 곳만 빙빙 돌 뿐이어요. 시간이 흐르며 다급해진 마음에 다시 용기를 내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쪽으로”라며 제 옷을 냅다 잡아당기는 거예요. 약속장소에서 만나 제 이야기를 들은 다른 시각장애인 친구는 말했습니다.
“난 내 흰 지팡이에 걸린 사람이 오히려 나한테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고 하던걸?”
시각장애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마음부터 더 단단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하루였죠.
제가 시력을 잃기 전에 좋아했던, 비 오는 날도 떠올려봅니다. 눈이 보일 땐 빗방울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스며드는 모습이나 창문에 맺혀있는 빗방울을 보는 게 좋았죠. 우산을 쓰고 걸을 때면 들려오던 ‘토독토독’하고 떨어지던 빗방울의 소리도요. 그런데 지금은 비 내리는 날이면 걱정을 먼저 하게 돼요. 비 내리는 소리로 인해 주변 소리가 가려지고, 길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를 피하기도 힘들거든요. 사설
제 인생의 책갈피는 이렇듯 행복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언제나 상처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고, 좋아하던 것들도 즐기기를 망설이게 되죠. 저뿐 아니라 누구나 크기가 다른 고민과 걱정의 씨앗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씨앗이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건강하게 자라서 예쁜 꽃을 피우는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저는 긍정의 물과 사랑의 햇살로 잘 키워 보려고요.
※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전체 시리즈와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Series/70020000000430
출처 :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